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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의 설립과 시련
1885년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라 두 목사가 이 땅에 발을 디딘 지 20년이 지나도록 어둠 속에서 잠자던 왕십리 골짜기에도 마침내 복음의 밝은 빛이 비쳐왔다. 1905년 봄에 노춘실, 김형섭, 한중선 세 분이 처음 믿기로 작정하고 연동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이해 가을 이들은 박한영, 전종식, 송계철 성도들과 함께 한성부 동부 인창방의 김판서 어른의 별장에 기도처를 설립하고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지만 수 백년에 걸친 유교사상과 무속신앙에 젖은 왕십리 주민들의 심령은 굳은 돌덩이처럼 변할 줄 몰랐으며 포교를 탄압하는 국가의 정책으로 신자의 수는 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음력2월에 박한영성도등 7-8명의 교우들은 옛 배명학교 옆, 현 도로교통안전협회 자리인 상왕십리동 782-2번지, 대지10명, 782-3번지 106평, 합116평을 2원에 사들여 함석지붕 목조9평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연동교회에서 파송한 박승명 조사를 모시고 왕십리교회의 이름으로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1911년 11월에 이명혁 조사, 조보희 전도부인의 지도로 소아회(유년주일학교)가 창설되어 왕십리 교회학교 교육의 기원을 열었다.
자립의 기틀을 잡아가던 왕십리교회는 1923년에 노훈 조사를 예배인도자로 모시면서 일약 성장기로 접어들었다. 1924년 교세는 세례교인 45명으로 배가되어 9평짜리 교회당을 헐고 그 자리에 공사비 420원을 들여 건평16평의 새 예배당을 지었으니 참으로 눈부신 성장이었다. 1928년 1월과 6월에 교회 설립 후 처음으로 본 교회 개척의 두 지도자 노춘실영수와 최인태영수를 1, 2대 장로로 세워 안수함으로써 온전한 당회를 이루었다.
1931년 1월 처음으로 주일학교반을 조직하였고 1931년 7월에는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설해 한글, 성경, 찬송가를 가르치기도 여 많은 어린이들을 교회로 모여들게 했다.
1933년 8월 왕십리교회는 상왕십리782번지 구 배명학교 옆에 공사비 1, 320원을 들여 32평 크기의 근대식 건물로 교회당을 신축하고건평 4평의 부속사택을 마련했다.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창씨개명, 종교적탄압으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줄어들게 되었고 한 지역안에 있는 여러교회를 통폐합시킴으로 인해 왕십리교회는 1942년 8월과 11월에 신당정교회와 하교교회와 합류하게 되었다. 점점더 시국은 한국 교회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으로 치달렸고 교세는 점점 위축되었다. 1944년 봄에는 '불온문서사건'으로 장로 한 사람과 집사 두 사람이 수감되는 고난을 당하여만 하였다.